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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 마음 "도선사 道詵寺의 밤숲을 거닐면서" 아주 오래된 책

밝은풀 2023. 7. 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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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 마음 "도선사 道詵寺의 밤숲을 거닐면서" 아주 오래된 책

도선사 道詵寺의 밤숲을 거닐면서... 깊은 밤 승려들은 바람과 적요를 만난다. 그것들은 길을 건너고 나무숲을 헤치면서 풍경소리가 뎅그렁뎅그렁 울리는 산간의 사원寺院을 찾아온다. 승려들은 바람소리를 본다. 바람은 기체氣體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도 본다고 하는 것은 보는 것이 눈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하늘이 푸른 것을 보고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고 적요의 쓸쓸함을 보고 그것들 속에 내재한 만상의 이치를 본다.

 

승려들이, 아니 사유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이러한 밤으로 택하는 이유는 밤에 가장 조용하게 그 모든 것들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얼마나 많은 시간의 밤을 나는 찾아갔던가!

 

검은 이파리 사이에서, 냇물가에서 의문들은 머리를 들고 일어서고, 그것들은 마치 도금한 놋그릇들처럼 반짝이면서 나의 가슴에 와 부딪친다. 무수한 파장이 일어난다.

 

물결은 왜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며, 나뭇잎은 왜 한없이 석석이는 것일까? 왜 나는 그 소리들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알자는 것일까? 안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물결이 흐르는 것은 땅이 경사졌기 때문에 흐르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에 밀리기 때문에 흔들릴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흐르고 흔들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밤에 밖에 나와 보면 그런 평면적인 대답이 무미건조하고 그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일까? 조주趙州스님은 이럴 때 무어라고 대답하셨을까? 여전히 라고 대답하셨을까?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님이 무라고 대답하셨을 때에는 다만 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무라는 말로 인해서 얻어질, 보다 크고 절대한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뒷날 대승들은 그것이 일체 명근名根을 끊어버리는 칼이라고 했고, 일체를 열어 주는 열쇠라고 했고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라고도 했고, 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이라고도 했다. 여기에 모든 정진하는 승려들의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조주스님의 는 각자의 길로서 보는 수밖에 없다.

 

조주 스님의 의 그 의지意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제승諸僧들은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무자화두無字話頭에는 좋은 비유가 하나 있으니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리라. 옛날 양귀비가 궁성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그의 애인을 궁성 아랫집에 살게 하고 매일 소옥아 소옥아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시종의 이름을 불러댔었다. 그렇게라도 하여 그의 음성을 애인에게 들려주는 의도에서였다. 다시 말하면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애인에게 전달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무자화두는 무자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를 통해서 얻어질 그 무엇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째서 조주스님은 라고 했는가, 그리고 뒷날의 대승들은 어째서 그것을 일체 명근을 끊어버리는 칼날이라고 했는가를 의구疑求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들을 밀고 나아가면 그 끝에서 잡상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 잡상을 드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을 버려 둬야 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의문 하나만을 간절히 간절히 일으키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의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주면서 오래오래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대들은 견성見性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난다. 견성이란 무엇일까? 자기의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다. 본성이란 그러면 또 무엇인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자기의 본체本體, 즉 만물의 근원에 자리한 불이다. 어떤 처사處士는 그 불을 구하여 일생을 보낸 끝에 어느 날 한 대승을 만나 이야기했었다.

 

이대로 시주만을 얻어먹고 도를 얻지 못하면 죽어서 소밖에 될 것이 있겠소?’ 이때 대승의 말, ‘소가 되더라도 무비공無鼻孔만 되면 좋지무비공이라는 그 말에 순간 처사는 대오大悟하고 꿇어 엎드리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무비공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어 지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사와 처사가 간지 수백년이 지난 뒤의 한 작은 암자에서 선사 전강田岡은 의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비공이라는 말에는 없다라는 허물이 있고 미각시아가味覺是我家라는 말엔 깨닫다라는 허물이 있으니 그런 허물을 가지고 어찌 제 암마리 식을 건너갈 수 있을까? ‘건너간다라는 말엔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구문상으로 불가피하게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해탈解脫에 있어서는 그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해탈을 가르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수한 승려들은 이렇게 의문에 의문을 넘어간다. 가령 나만 하더라도 일찍이 견성見性의 미미한 그림자를 보았을 때 세상에 내어 던진 소리,

 

만상의 나무들이 누렇게 시든는데

벼랑 위에 오직 한 나무 싱싱하게

푸르러 있더라

 

오늘 나는 어두운 도선사道詵寺의 나무숲을 헤치고 가면서 그 게송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잎사귀가 시들고’ ‘홀로 푸르다는 흔적을 남기고 지혜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미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바람처럼, 마치 달빛처럼,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어떠한 그릇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자유자재로 담길 수 있는 것이 대오大悟가 아닐까?

 

그러한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는, 시늉할 수도 없는,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그럴 것이다. 그래서 효봉종사 曉艂宗師께서는 입멸入滅하시면서 수많은 불자佛子들이 송 을 바랐을 때,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것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빛이 천강千江

비치리라고 했던 것이다.

 

오래된 책 한 권을 서재에서 찾았다. 1974년에 발간된 청담스님 마음이다. 예전에 누가 폐지 버리는 곳에 버린 책들 중에 유독 눈에 띄어 주워온 책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이다. 청담스님은 분단된 조국,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셨고 양단의 대립된 사상 속에서 불안에 떠는 인류를 위한 평화를 갈구하시던 청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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