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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제주 거상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없는 재물은 썩은 흙..."

밝은풀 2023. 6. 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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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제주 거상 "사람의 인명(人命)을 구할 수 없는 재물은 썩은 흙과 같다"

김만덕은 조선 후기(1739년~1812년) 제주도 출신의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그녀는 기생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양반들은 돈에 대하여 "양반은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처럼 상업은 천대를 받았다. 본래 김만덕은 제주의 양가집 출신인데 12살에 부모를 잃어서 제주의 관기(官妓)가 그녀를 수양딸로 삼으면서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20살이 될때 "나는 본래 양인의 출신이니 본래의 나의 출생을 회복시켜달라"라고 제주 관청에 청원하여 신분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주도적으로 스스로 살기 위해서 상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김만덕은 어떻게 거상이 되었는가? 

 

김만덕은 신분을 회복한 후 제주항 입구에 객주(客主)를 차리게 된다. 객주는 조선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의 거처를 제공하며 물건을 맡아 팔거나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상인 또는 그런 집"을 말한다. 김만덕은 제주에 배가 들어오는 입구에 객주를 차려서 객주에서 상인들을 머물게 하고 상인들의 일을 대행해 주면서 거상이 되었다.

 

김만덕은 제주에 있는것은 팔고 제주에 없는 것은 사서 제주로 들여와서 판다라는 생각으로 장사를 했다. 특히 양반들이 쓰는 갓과 녹용 그리고 제주의 해산물등을 육지에 팔고 제주에 없는 물건 중에 특히 여자들의 사치품을 들여다 박리다매(薄利多賣)했다는 것이다. 물건값을 적정 가격과 할부로 판매해서 그녀는 신용을 지키는 것으로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만덕은 바다를 기회로 만든 발상의 전환을 한 상인이다.  

 

그녀는 1795년 제주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세 고을에서만 6백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흉년이 들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었다.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이 없으면 장차 제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받자, 2만 섬의 구호식량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1795년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쌀을 사왔는데, 50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했다자신의 재산을 털어 백성들을 구휼했습니다. 그녀의 선행은 조정에 알려졌고, 정조 임금은 김만덕에게 상을 내리는데 그녀는 거상이니 상으로 재물은 필요 없다고 청하고 정조임금에게 바다를 건너 한양을 구경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임금님께 소원을 청해서 정조임금은 그녀를 한양으로 불러 금강산 유람을 허락했습니다.

 

옛날에는 월해금법(越海禁法)이라는 법은 '제주여인은 육지를 나갈수 없는 법'이 있었다. 그래서 정조 임금은 김만덕에게 '행수의녀'로써 '내의원 차비대령행수(內醫院 差備待令行首)'로 삼아 정조를 알현할 자격을 주고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의 관직 계급이 '내의원 차비대령행수'이다.

 

그녀는 한양을 구경하고 금강산을 구경한 후 마지막 제주로 돌아가기전에 김만덕을 배웅한 사람이 채제공 재상이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김만덕에 관하여 글을 쓰라고 명령한 사람이 채제공 재상이다. 김만덕이 제주로 가는 마지막날 "만덕전"이라는 책을 김만덕에게 전해주면서 "너는 탐라에 태어나 한라산의 백록담 물을 마시고 이제는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였으니 온 천하의 사내들 중에서도 이런 복(福)을 누린 자가 또 있겠는가?"라고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정약용선생도 경세유표(經世遺表)에 김만덕의 선행을 소개하고 칭송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 후손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졌다.는 뜻으로 김만덕의 선행을 후세에 남게 한 것이다. 김만덕은 평소 "밥 한 그릇이라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人命)을 구할 수 없는 재물은 썩은 흙과 같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만덕은 이런 마음의 철학을 가졌다. 수많은 목숨을 구한 것이다.

 

김만덕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금기를 깨트린  조선 최초의 여성 CEO이며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거상이다. 김만덕은 조선 시대 여성의 위상을 높이고,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김만덕은 1799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제주도에서 '만덕상'이라는 상을 제정하여, 매년 그녀처럼 아름답게 산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있습니다.

 

1812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만덕의 묘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조성되었으며,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김만덕 묘비(金萬德 墓碑)2007124일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김만덕 사망한 1812(순조 12)에 세워져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문에는 김해 김 씨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수로왕 후손뿐만 아니라 경순왕 후손의 일부도 본관을 김해로 썼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1846년(헌종12)1846년(헌종 12)에 국왕의 윤허를 받아 후김은 경주 김 씨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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