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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이회영'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형

밝은풀 2023. 4. 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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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이회영'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형

3월에는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특히 2023년은 더욱 독립운동가들이 생각나는 해(年)이다. 이분들의 희생이 없이 대한미국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심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참으로 그분들은 지혜롭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형이다. 

 

이회영(李會榮) 1867년 ~ 1932년 대한제국의 교육자 사상가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특히 아나키스트계의 독립운동가이다. 아나키스트란 아나키 상태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신민회 창립멤버로 가담하였다. 신민회(新民會)는 상동감리교회 부설 공옥학교의 교사들과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전덕기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민족 운동을 위한 개신교 감리교회, 장로교회 지원을 받는 항일 비밀결사단체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개신교의 지원을 받은 신민회가 1911년 서간도 길림성 통화시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1931년 9월 상하이에서 무정부주의운동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옥사하였다. 사망 당시 일본 영사관 당국은 체포된 노인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서둘러 그의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수상한 정황 때문에 고문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의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다고 한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李會榮) 독립운동가는 조선시대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자 성원(聖元),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 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이다. 이종찬의 아버지 이규학과 이종걸의 아버지 이규동은 이복형제간으로, 이규학은 서씨 소생이고 이규동은 이은숙 소생이다. 우당 이회영은 1867년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유승과 동래정 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부(漢城府)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양반가의 자제로 유년기에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그는 본래의 유교사상에서 기독교 감리교 사상으로 개종한다. 이상설(李相卨)과 절친했던 그는 그 뒤 조선과 대한제국협회인 '독립협회'와 조선말 대한제국의 대토론회 시민운동이자 시민사회단체로 독립협회에서 처음 주관한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계몽, 강연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개화 이전에 노비 해방, 적서(嫡庶) 타파, 여성의 부당한 인습에 의한 권리 박탈에 반대, 개가와 재혼을 장려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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