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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외국인들 '오백나한'이 친근한 이웃처럼 "성찰과 위안"을 줄까

밝은풀 2023. 4. 10.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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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이 외국인들까지 친근한 이웃처럼 "성찰과 위안"을 준다는 걸까요.

‘오백나한’이 어째서 국내는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 친근한 이웃처럼 다가와 성찰과 위안을 준다는 걸까요? 지난 2021년 12월 2일 ~ 2022년 5월 15일 '한호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창령사 절터에서 발굴된 석상(2001-02년 발굴)을 전시했다.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한 고려시대 나한 석조상 50여점을 출품한 ‘창령사터 오백나한’ 전시였다.

 

‘오징어게임은 비켜라-한국의 다음 주자는 나한이다.’(시드니모닝헤럴드)   2021년 12월 2일 ~ 2022년 5월15일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관련 전시회가 누적관람객 23만 명을 돌파하는 인기를 끌며 막을 내렸다.

 

"호주도 열광한 볼매 얼굴" 코로나로 호주도 대한민국도 자유롭지 않는 상황에도 23만명 관람객은 결코 '나한'님의 힘이 아닌가 싶다. "너는 무슨 소원이 그리 많은가?" 나한님은 우리의 개인 갖가지 소원을 잘 알고 오백분의 각자 특성에 따라 이루어주시는 분이다. "창령사(蒼嶺寺) 오백나한"의 발견을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깊고 높은 절터, 신비로운 발견' 이라는 이다.

 

불교에서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로 산스크리트어 아르한(arhat 阿羅漢)을 한자로 음역하여 만들어진 말이며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일컫는다. 오백나한은 부처 입멸 뒤 그의 말씀을 경전으로 편찬하기 위해 모인 500명의 제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깨달음을 얻기는 했으나 그들 스스로 열반에 이르지 않고 중생들을 가르치고 구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머물렀다. 

 

‘창령사터 나한상’은 2018년 9월부터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첫선을 보인바 있는데요. 특별전은 이듬해(2019년) 3월까지 연장될 만큼 인기를 끌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이 뽑은 ‘2018년의 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춘천박물관 전시는 전국의 국립박물관이 2018년 1년간 주최한 특별전을 대상으로 관내 외 전문가(내부 20명, 외부 16명)와 관람객 만족도 등을 종합평가한 결과 관내 외 전문가들의 압도적인 점수를 받아서 단연 1등으로 꼽혔습니다. 종합점수 1위의 특전으로 ‘서울순회전’(2019년 5월 29~6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이 열리기도 했다.

 

2001년 5월1일이었습니다. 강원 영월군 남면 주민 김병호 씨는 창원2리의 소유지에 암자를 지으려고 경작지 평탄작업을 벌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은 ‘무덤치 절터’로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 형상의 석상들이 하나 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김병호씨는 그렇게 수습한 조각상 100여 점을 천막하우스에 보관했고, 그중 상태가 좋은 6점은 임시로 가설된 암자 안에 봉안해 놓고는 유물출토사실을 관계당국에 신고했다.

 

격발굴결과 총 317점의 석상이 확인됐으며, 그중 완형은 64점이었습니다. 나머지 250여점은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발견됐습니다. 몸체는 135점, 머리는 118점이었습니다. 일부 석상은 열에 노출된 채 확인됐고, 이 석상을 모신 금당 또한 화재로 폭삭 내려앉은 모양새였습니다.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에서도 누군가 창령사 석상을 훼손하고 아예 불에 태웠을 가능성이 짙다. 그 당시에는 사찰로 몰려가 불상을 태우거나, 깨뜨린 유생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한상 317점 가운데 250여점은 몸체가 얼굴이 분리된 채 노출되었다. 절터에서 사찰의 강당이 불에 타 무너져버린 흔적이 역력했다. 강원문화재연구원 제공

 

창령사 오백나한만의 특징이 있다. 다른 곳 불상의 ‘엄근진’한 표정도 아니고, 다른 나한상처럼 ‘이국풍 얼굴’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한상의 얼굴은 다른 불상들에 비해 좀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나한’이라는 존재가 대승불교 이전, 즉 석가모니와 가까이 있던 성자들을 가리키기에 아무래도 인도인의 이미지를 좀 더 강하게 표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창령사 오백나한은 다르다.

 

2018년 열린 국립춘천박물관의 특별전 제목에 ‘당신의 마음을 닮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 어디선가 보았던 친근감 있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얼굴처럼 꼭 이 나한상과 꼭 닮은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나한들이다. 

 

▶ 창령사터에서 확인된 오백나한상의 얼굴은 어떨까요. 역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면을 바라보는 상이 대부분이지만 대화를 나누듯 옆면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거나, 생각에 잠겨 있거나 바위 뒤에서 살짝 고개만 내민 나한상들도 있습니다. 위로 치켜뜨거나 아래로 내리뜬 눈,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진 눈, 화두 해결을 위해 고뇌에 빠진 눈, 잔뜩 화가 나서 째려보는 눈 등 다양한 시선처리가 돋보입니다.

 

또 양 입술을 위로 올려 가볍게 웃고 있거나 입꼬리가 내려가 침울한 표정으로 슬픔에 잠긴 나한상도 있습니다. 일상의 희노애락을 나한상으로 표현했습니다. 당대의 조각가가 오백나한상을 한 곳에 봉안할 때의 전체적인 배치와 구성까지 고려한 것이겠죠.

 

오백나한의 얼굴크기는 약 12cm 내외이다. 얼굴전문가에 따르면 조각가가 작업할 때의 동작거리는 약60cm 정도 되는데, 안구의 시축(약 25mm)과 황반의 지름(5mm)을 감안할 때 조각품의 크기가 12cm 정도가 되면 얼굴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부분과 전체형태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조용진 한국형질문화연구원장 제공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 오백나한의 고향인 강원도 영월을 찾아 평창에서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 전시회 이후 오랫동안 벼르던 일을 드디어 해내는 기분이었다. 창령사에 들렀다. 창령사(蒼嶺寺: 깊고 머나먼 절)를 실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산으로 오르는 길이 더욱 급해지는 산모롱이에서 ‘창령사지’라고 적혀 있는 나무간판이 반갑게 등장한다. 손바닥만 한 간판에는 퇴색한 연등이 하나 걸려 있다. 좁은 골짜기 급한 길을 수백 미터 오르니 가건물의 절집들이 나타났다. 

 

이 절은 발굴에서 ‘창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기록으로 전하던 창령사임이 확인되었다. 창령사 절터가 자리한 곳은 속설에 ‘무덤치 절터’라고 불리던 곳으로, 고대 기록에 나오는 석선산(石船山: 지금의 초로봉으로 짐작)의 7부 능선 높이에 있다. 급한 산골짜기 사이로 안개가 올라오는 날이면 아마도 이곳은 구름 속에 신선이 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절터에서 하나 놀란 것은 산꼭대기 부근인데도 비가 온 영향인지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샘이 마당 한가운데 있다는 점이다. 절터의 북쪽은 암맥이 절벽을 이루고 드러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절터의 풍수로 보면 이곳은 기도처나 공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절터가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과정이 한편의 드라마다.

 

이 절터의 소유자이자 오백나한을 발견한 김병호씨의 부인은 아직도 원주에서 무당을 하고 있단다. 부인은 이유 없이 몸이 계속 아팠는데, 선몽(先夢)을 받고 이곳에서 기도를 했더니 몸이 씻은 듯이 좋아져 땅을 구입하고 절터를 닦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 깊은 산속에서 사라진 절터를 계시받았다는 것 자체가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김씨도 절터에서 산신할머니의 이미지를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절터가 영험한 것은 아마도 영월 사람들도 알았던 것 같다.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창령사의 발굴은 김씨가 이곳에 집을 짓는 과정에서 땅구덩이에서 큼직하고 두루뭉술하게 생긴 돌덩어리들을 파낸 것이 발단이었다. 절의 중앙에 흐르는 샘물에 씻어 보니 얼굴과 옷을 표현한 모습들이 나타났다. 바로 나한상이었다. 선몽을 꾸고 이곳에 들어온 김씨 내외로서는 엄청난 희열이었을 것 같다.

 

그렇게 하여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1년과 이듬해 두 차례 절터 발굴을 진행하였고, 현재 강원도기념물 81호로 지정되었다. 발굴에서 수습된 부처의 개수는 300구가 넘는다. 아마도 한 자리 발굴에서 가장 많은 수의 부처상이 발견된 경우일 것이다. 그중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과거불의 대표인 제화갈라보살(提華鞨羅菩薩)로 추정되는 불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오백나한 가운데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창령사의 오백나한은 화강석 거친 표면에 밴 미소와 다양한 감성의 표정이 보는 이에게 섬세하고 따뜻하게 다가가는 것이 큰 매력이다. 오백나한의 얼굴에 깃든 오백 가지의 다른 미소와 표정들은 결국 희로애락을 뛰어넘은 우리 군상들의 표현이 아닐까? 화난 표정조차도 천진스러운 모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씻어주고 있다면 이를 제작한 장인은 이미 그 도의 경지에 있었을 법하다.

 

나한들의 모습을 보면 표정뿐 아니라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의 다양한 양식에도 놀랄 만하다. 오백 구가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백나한전은 부처들의 패션쇼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자세도 그렇지만 옷도 어깨를 벗은 모습, 한쪽으로 걸친 모습, 양쪽 어깨를 다 덮은 모습, 모자를 쓴 모습, 허리띠를 한 모습 등 각양각색이다. 스님의 장삼을 보면 그게 그것 같은데, 나한들의 옷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세상의 온갖 모습에서 부처로 갈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발굴에서 수습된 유물 중에는 12세기 송나라에서 사용하던 숭녕중보(崇寧重寶)도 있고 청자들도 보인다. 모두 고려시대의 것들이 틀림없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오백나한은 언제 만들어져서 봉안되었을까? 돌을 이용해 오백나한을 조성하려면 상당한 재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절절한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봉안 시기를 알게 된다면 그 동기도 추정 가능할 수 있다. 발굴에서 많은 수의 분청사기 조각들이 수습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 대체로 15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나한을 조각한 양식적인 편년으로 보아도 대체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5세기의 후반과 16세기 초를 전후해 일어난 이 지역의 주요 사건은 1457년에 있었던 단종 유폐와 죽음일 것이다. 단종이 죽고 나서 이 지역 유지인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치른 것이나 전설로 전해지는 이 지역 주민들의 단종에 대한 극진한 정서를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 사는 누군가는 무엇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단종을 기리기 위해 시일이 지난 후 지역 토호의 후예들이 한양 권력자들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깊은 산 좁은 정상의 작은 절에 모신 것이라고 상상하면 안 될까? 피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어린 왕이 내세에서 나한들과 극락왕생하라는 뜻으로 조성하지 않았을까? 밤에는 절터에서 영월 읍내의 불빛이 내려다보인다는 김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기대가 섞인 상상이다.

 

중국 항주 영은사(靈隱寺)의 오백나한상 중에는 마조(馬祖) 스님의 스승이 되는 신라의 왕자 무상(無相) 스님의 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창령사의 오백나한 중에도 단종의 얼굴"이 들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곳을 방문하던 날 텅 빈 절터를 이리저리 살피고 내려오다 밭일하고 돌아오는 김씨를 만나 전설 같은 발견 과정을 들었다.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오죽 답답했는지 ‘하늘이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나(天聾尙未聞哀訴)...’라고 읊었다. 오늘날 오백나한들은 아마도 세상의 온갖 고민을 들어주러 절터에서 하산하였으리라 상상해 보는 것은 현세인의 고민이 큰 탓일까. ■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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