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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더욱 생각나는 애국자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여사

밝은풀 2023. 4. 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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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여사 3월에 더욱 생각나는 "한국인의 어머니 정신"

지금 우리 사회에 기득권들의 자식이 학교폭력으로 사회의 비난으로 혼란이다. 이런 모든 것은 가정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식은 사랑은 하되 바른 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맹목으로 사랑하는 것은 방치나 다름없다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바른 가정교육이 되는 것이다. 내 자식만 최고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신이 바르지 못하면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사회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시대는 바뀌어가는 과도기이다. 기득권의 오만과 기고만장한 거만의 시대는 무너지고있다. 약자를 사랑하고 품지 못하는 정치인과 기득권은 앞으로 비난을 받고 국민들이 표를 주지 않고 하늘의 벌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사회의 혼란을 보면서 '조마리아'여사의 그 정신이 국가를 위한 큰 자식들을 키운 것으로 현재 대한민국이 생존하는 것이다. 2023년 3월에 더욱 생각나는 어머니 '조마리아'여사님 

 

조마리아 여사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다.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을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 말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유난히 길었던 1910년 겨울, 어머니는 때 아닌 여름 옷감을 꺼냈다. 아들이 입을 수의를 짓기 위함이었다. 3년 전, 국경을 넘어 대륙으로 간 아들은 사형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죄명은 살인. 그의 총구가 겨냥한 것은 힘없는 조국의 주권을 훔친 원수, 이토 히로부미(1841~1909)였다.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안중근은 결국 항소를 포기했다.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 어머니의 전언대로 의연히 죽기로 결심한 그때, 그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절대로 삶을 구걸하지 말라던 어머니와 그 뜻을 따른 아들을 두고 적국의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시모시자(是母是子)’. (아사히 신문, 1910)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안중근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가려진 뿌리, 조마리아는 지사의 어머니이자 지사였던 시대의 여걸이었다. 

 

현시대에도 크고 훌륭한 자식을 키우려면 부모의 자식교육 정신을 본받아야 될 것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해야 하는 한국의 어머니 정신이다.  

 

그가 잃은 것은 맏아들 하나뿐이 아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마자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은 공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간신히 풀려난 아들들과 함께 끊임없이 타국을 떠돌 때, 중근이 남기고 간 일곱 살 난 손자마저 잃었다. 안중근 가족을 끈질기게 쫓은 한 밀정이 건넨 과자 속엔 독이 들어 있었다. 아이는 타인의 호의를 의심할 줄 모르는 나이였다.

 

“어머니, 자식의 막심한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 아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합니다.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시오.” 천주교의 교리에 반하는 죄를 지은 바, 자식만큼은 평생 신의 은총 속에서 살기를 바랐던 안중근의 유언은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 됐다.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잃었지만 그는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해졌다. 식솔들이 일제의 위협을 피할 곳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으로 110㎞ 떨어진 낯선 땅에 간신히 정착했다. 춥고 척박했지만, 오히려 그 거친 땅은 여사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독립운동의 무대가 됐다.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쉬는 날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동포들을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자) 이미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거대한 대륙을 누비는 고행길에 맹수와 산적이 끊이질 않았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 사납게 아가리를 벌리는 짐승들 앞에서도 조마리아는 대담했다. “같이 가던 청년들 수십 명이 땅에 엎드려 꼼짝 못 할 정도였죠.

 

이때 여사께서 내려오더니 ‘이놈들아, 독립운동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엎드리기만 할 거냐? 이렇게 엎드려 있다간 다 죽어’라고 대갈일성을 했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정화암) 마부를 밀쳐내고 스스로 고삐를 쥔 조마리아는 벼락처럼 소리쳤다. “죽는 한이 있어도 가고 보자.” 내지르듯 달려 나간 마차가 적들의 혼을 빼놓아 결국엔 모두가 무사했다는 후문. 당시 여사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독립운동가 이강이 ‘범을 낳은 범, 세상에 다시없을 여걸’이라 회상할 만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쉽게 다루는 일이 없고, 누구의 말이든 반드시 끝까지 들었던 그는 곧 김구를 비롯한 현지 운동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아들을 조국에 바쳤듯이 자신의 인생 또한 그 앞에 헌신했다. 손주들이 돈이 없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궁핍한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헌납했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사력을 다한 탓이었을까. 조마리아는 1927년 7월 15일, 암투병 중 66세의 나이로 타국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남은 자식들은 어땠을까. 김구를 도와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넷째 안공근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충칭에서 암살당했고, 독립군단을 통합시켰던 셋째 안정근은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상하이에서 객사했다. 딸 안성녀는 몰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어 입히며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연구자들의 무관심 속에 아직까지 독립 유공 서훈을 받지 못했다.

 

5대째에 이르러 수백 명 가까이 불어난 후손들은 몰락의 길을 걷다 뿔뿔이 흩어졌다. 해방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죠.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놈들이 권력을 잡아 그때와 다를 것 없습니다” (안중근의 조카 민생이 사촌 동생 경옥에게 보낸 편지) 해방된 조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들은 국경 너머 북으로, 바다 건너 미국으로 건너가 영영 소식이 끊어졌다.

 

조마리아의 유해는 상하이 내 프랑스 조계지에 묻혔으나 지금은 무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도시개발로 묘지를 갈아내고 건물을 세우며 사라진 탓이다. ‘하얼빈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아들 안중근의 유해 또한 중국 땅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15일은 조마리아 여사가 세상을 뜬 지 91년이 되는 날. 어머니의 혼도, 아들의 혼도, 그 후손들의 삶도 제대로 보듬지 못한 우리에게는 여전히 부끄럽기만 한 날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조마리아(조성녀(趙姓女), 배천 조씨 부인, 안중근의 어머니이다. 1862년 ~ 1927년 본관은 천주교 세례명은 마리아(瑪利亞)이다.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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