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봉스님' 스님이 기복을 부추기고 "해결사"인 양 해서는 안돼
'사랑하며 용서하며' 작가로서의 향봉스님 사진은 젊었고 형제인 정다운 스님과는 형제라도 얼굴이 닮지 않았다. 실제 정다운 스님은 실물을 법회에서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향봉스님은 책에 나온 사진만 본 것이다.
강남 봉은사에 다닐 때 지금은 봉은사가 변하여 예전과 다르지만 에전에 봉은사는 매일 기도를 가면 봉은사 들어가기 전에 사천왕문(四天王門) 전에 큰 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에서 조용히 앉아서 좀 쉬면 다양한 보살님들의 이야기가 소식을 전해준다. 그때 향봉스님 책이 나와서 향봉스님을 알게 되었다.
예전의 강남 봉은사는 새벽 기도 가면 눈이 온 날은 탑 앞에 토끼도 경기고등학교 쪽 산에서 내려와 새벽기도를 기분 좋게 해 주기도 했다.
유튜브로 향봉스님의 말씀을 듣고 작가가 아닌 마음속 깨달음의 진실이 책으로 나온 것을 이제야 이해가 된다. 요즈음 온 나라에 도사가 무엇을 해결한다는 헛소리를 보면서 안타까운데...ㅉ
향봉스님의 예전 인터뷰기사에 "스님이 기복을 부추기고 해결사인 양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 말씀에도 백번 공감이 간다.
세상 사람들도 성직자도 자신의 일도 완성 못하면서 남의 일을 해결해 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모든 일은 내가 만들고 내가 하는 것이다. 내 집 조상 기도는 내가 하면 된다. 지장경에도 돌아가신 영가 기도는 죽은 사람보다 산사람에게 복이 더 간다고 했다. 나의 조상은 내가 기도하면 백점이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의 모습 향봉스님을 유튜브로 보면서 너무나 큰 감동이다. 아주 소소한 법문으로 쉽게 이해하게 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다. 조현TV휴심정 이분께도 감사드린다. 인터넷 시대 유튜브의 힘이 이런 것이다. 이것이 해인시대(海印時代)인 것이다.
향봉스님은 “내가 있는 곳에서 해 뜨는 곳이 동쪽이고, 해지는 곳이 서쪽인 것처럼 불교는 ‘내’가 주인공이고 세상의 중심인 종교다. 그것이 불교의 핵심인 중도다. 모서리에 앉아도 그곳이 나에게는 중앙이 된다. 유교의 중용이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라면 중도는 좌우가 없고 변두리가 없다. 임제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가는 곳마다 주인)다. 모든 사람이 아웃사이더가 아니고 인사이더다.”
향봉 스님은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고 마음이 열리면 세상이 열린다”며 “모으고 쌓아두려는 집착을 버리고 풀어주고 덜어내고 베푸는 마음으로 한 생각을 돌리면 행복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말을 맺었다.
일반에는 승려 시인 이향봉으로 더 유명했다. 1970년대 <사랑하며 용서하며>, <무엇이 이 외로움을 이기게 하는가> 등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역시 승려 시인으로 베스트셀러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을 쓴 정다운 스님의 동생이다. 그런 그가 1990년대 초 한국땅에서 홀연 자취를 감췄다. 인도에서 3년, 네팔에서 2년, 티베트에서 3년, 중국에서 7년을 떠돌았다고 했다.
“스님이 기복을 부추기고 해결사인 양 해서는 안돼”
익산 |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2013.01.17 20:57 입력 2013.01.17 22:42 수정 8년째 은둔 수행 ‘왕년의 승려 시인’ 사자암 향봉 스님 ▶ 전북 익산 미륵산 중턱. 수직에 가깝게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300m쯤 올라가면 앞뒤로 커다란 바위를 두르고 있는 사자암(獅子庵)이 나온다. 향봉(香峰) 스님은 거기 있었다. 사자암에서 왕년의 ‘스타 승려’ 향봉 스님을 만났다. 그는 이 조그만 암자에서 상좌(제자), 공양주(절에서 밥을 짓거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도 없이 홀로 은둔 수행 중이다.
15년 동안 인도, 티베트, 네팔, 중국 등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사자암에 은둔 수행 중인 향봉 스님은 “욕심은 버릴수록 아름답고,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된다”고 말했다. 익산 |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저녁 여섯 시에 잠들고 자정에 일어난다. 홀로 밥 지어먹고,글 쓰고, 산책한다. 이곳에선 신도들을 위한 기도나 49재, 합격 기도 같은 걸 하지 않는다. 내가 목탁치고 염불 한다고 영가의 업장이 소멸될 리 없다. 극락왕생은 가당찮은 이야기다. 시험에 합격시켜 줄 능력도 없다. 내게 굳이 49재를 부탁하면 쌀 한 말 받는 걸로 통일했다. 나는 법회에 나가도 돈을 받지 않는다.”
“사찰에서 신도들의 신앙심을 이용해 몇 백만 원부터 천만 원씩 돈을 받는 건 한국불교의 장삿속이다. 마치 대리운전하는 식으로 스님이 기복을 부추기고 해결사인 양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스님들이 열반했는데 호화 꽃상여로 치장하고, 만장을 줄줄이 앞세운다. 이것이 유교 풍습이지, 불교 가르침인가. 출가 수행자는 무소유, 무집착해야 하는데 세속에서도 하지 않는 육순 잔치, 칠순 잔치를 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다짜고짜 한국 불교계를 비판하는 스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고, 말은 거침없었다. 그는 1962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전남 백양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선방을 거쳐 스물여섯 살에 불교신문사 편집국장을 맡았고 주필, 주간, 부사장을 지냈다. 조계종 총무원 포교부장, 총무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종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불교계 ‘실세’였다.
일반에는 승려 시인 이향봉으로 더 유명했다. 1970년대 <사랑하며 용서하며>, <무엇이 이 외로움을 이기게 하는가> 등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역시 승려 시인으로 베스트셀러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을 쓴 정다운 스님의 동생이다. 그런 그가 1990년대 초 한국땅에서 홀연 자취를 감췄다. 인도에서 3년, 네팔에서 2년, 티베트에서 3년, 중국에서 7년을 떠돌았다고 했다.
“그건 허송세월이었다. 내장사 주지를 하는 동안 간절하게 철이 들었다. 부처님 진리에 목말랐다. 더 늙기 전에 부모님으로부터 몸 받기 전(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나’는 누구인지, 그 주인공을 알고 싶었다. 그걸 해결하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인도땅에서 돈이 떨어져 노숙을 하다시피 했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래도 몸과 마음을 던져서 부처님 가르침에 다가섰다. 그러던 어느 날 아! 하는 찰나지간에 지견(知見)이 환히 열리는 종교 체험을 했다고 한다.
“무엇을 묻든 막힘없이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경전과 선어록에 대한 의문도 깨끗이 해결됐다. 전생과 현생이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이 윤회할 뿐이란 걸 알았다. 지킬과 하이드가 한 사람인 것처럼 흔들리고 허덕일 때는 축생(짐승)이 된다. 그렇게 매 순간 윤회한다. 지나간 세월은 전생이다. 그때 과거의 향봉은 죽었다. 지금의 내가 현생의 향봉이다. 마음을 제대로 쓰면 언제나 지금이 바로 황금기다.”
15년의 치열한 구도행을 끝내고 2004년 귀국해 사자암에 들어앉았다. 스님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9년 가을, 지리산 야단법석에서다. 사형인 도법 스님이 그를 불러냈다. 그는 작심한 듯 “한국 선원에서 좌선에만 치중하면서 스님들의 의식까지 앉은뱅이가 됐으니 깨달은 도인이 나올 수 없다”며 “5대 총림 큰스님 누구도 진실로 마음이 열렸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시자가 대신 써주는 큰스님 법어, 안거를 끝낸 스님들에게 수백만원씩 주는 과도한 해제비(여비) 등을 문제삼았다. 그것도 사찰과 큰스님의 실명을 들먹였다. 해당 절집의 스님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는 “사자암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누구든 찾아오면 법거량(선문답)을 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불교계 비판 이후 더 이상 그를 부르는 야단법석은 없었다. 그는 2011년 스스로 겪은 법거량 일화를 담은 <선문답>, 한국 불교계를 비판한 <일체유심조>, 그리고 시집 <행복을 위한 자유를 위한>을 펴냈다. 과거의 명성에 비하면 반응은 시원치 않다. 스님은 “본시 내 것이랄 게 없으니 집착도 없다”며 “어렵지만 자유롭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산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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