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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선생 "항일과 반독재 마지막 선비"

밝은풀 2023. 4. 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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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선생 "항일과 반독재 마지막 선비"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은 경상북도 성주(星州) 대가면 사월리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항일과 반독재에 맞선 마지막 선비이며 독립운동가이다. 김창숙 선생은 1910년에 성명(星明) 학교를 세워 후진양성 하였고 일진회를 성토하다 옥고를 치렀고 일제가 강점하자 중국에 망명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는 한편, 유림단(儒林團)을 통해 구국항쟁 하여 마침내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그의 생가는 홑처마 우진각기와지붕의 구조이며 향좌측부터 부엌, 안방, 마루, 건넌방 순서로 평면이 구성되었는데 건넌방 뒤로는 반침이 있고 대청 앞쪽엔 유리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에 13대 조인 동강 김우응(金宇응)의 저서인 『속자치통감목(續資治通鑑目)』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맹렬히 촉구하는 성명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자유당 일방으로

악법을 통과 시키고 시행함은

전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하야하라

 

내 죽거든 

내 눈을 빼

대한문에 매달아 놓으면

포악한 독재정권이

반드시 망할 것을 목격하리라.

 

자유당 일방으로 악법들을 통과시키고 계속 집권하겠다고 대통령이 헌법을 고쳤고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경험을 하게 됐으며 또 경찰의 비호 아래 깡패들은 김창숙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을 짓밟았다. 총칼을 앞세워 무력과 민의를 조작으로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권을 유지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 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죽어서도 자신의 눈을 뽑아 걸어 놓아서 독재자가 망하는 꼴을 보겠다고 말한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

 

조선의열단 나석주 의거를 계획하고 자금을 지원한 사건▶ 나는 드디어 가지고 온 무기와 행동 자금을 나석주 등에게 주면서 "제군의 용감함을 후일 독립사에 빛나게 될 것이니 힘써주오"하고 당부하였다. 

 

1919년 유림(儒林)들의 뜻을 모아 독립청원서 "파리장서"를 만들어 유생들의 서명을 받아 중국으로 가지고 상해로 간다. 그곳에서 영어와 불어로 번역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보낸다. 이 일이 국내 알려지면서 500여 명의 유림이 체포되는 1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김창숙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중국에 독립운동하는 사람 중에 유림(儒林)을 대표하니 중국인들이 신뢰를 받은 것이다. 당시 '중국 국민당 총리 손문'을 만나 조선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창숙이었다. 1921년 중국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과 망명지 중국에서 발행한 "항일 잡지 천고(天鼓·하늘북)" 발간했다.

 

1925년 김창숙 등이 와서 말하기를 종애의 독립운동은 모두 실패했고  독립운동을 잘 지속시키려면 만주에 20만 원의 자금을 투자하여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둔전병식으로 함으로써 조선에 무력진격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옥살이를 하다 옥고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심산 유고에 담긴 김창숙의 어머니에 대한 글이다.

 

듣자오니 어머님께서는 운명하실 즈음에 조금도 죽음을 슬퍼하는 말씀이 없었고 오직 '창숙아' 세 번을 부르시고 운명하셨다 합니다. 너무도 슬픕니다. 소자가 지금 피눈물로 무덤 아래서 뒹굴고 있는데 어째서 어머님은 한 번도 창숙을 부르시지도 불효한 죄를 책하시지도 않습니까

 

1945년 해방이 왔지만 일본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서 반쪽 땅이 되었다. 이승만이 들어오면서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정당들이 우수수 생겨났다 그러나 김창숙은 정당의 대표 제안을 거부 헸다.

 

민독당 당수 "벽초는 나의 편백 조롱하더니 스스로 차지했다" 사회당 당수 "소앙은 나의 고집 어리석다 하더니 스스로 걸터앉았다" 사회당 당수 "얄미울손 남로당 음흉한 소련을 조국인양 우러러하고" 두려울손 자유당 "낮도깨비 떼지어 함부로 날뛰고" 놀라운손 민주당 "턱없이 자기과장 요란스럽고"

 

아, 이 세상 모든 당인 그대들 목적한 바 권세와 이익일 뿐. 나는 나의 지키는 것 따로 있으니 당인들이여 나를 원망치 마시오. 김창숙 선생은 친일파 청산이었다.  

 

현재 임시정부에서 과도기 정부를 준비하고 있으나 만일 친일파와 반역자가 혼입 된다면 우리 건국의 앞길은 극히 위험하니 이 점을 깊이 유의할 것을 절실히 권고하고 싶다. 

 

우리가 왜놈의 감옥에서 나온 지 몇 달이 못되어 또다시 미국과 소련의 감옥에서 썩을 것을 각오하고 싸우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 삼천만 민중이여! 다른 민족의 탁치를 밑에서 노예 우마가 되어 살기보다 차라리 자유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싸워 순국선열의 뒤를 쫓는 것이 우리 민족의 유일한 의무다. 탁치가 취소되고 군정이 철거되는 날까지 의혈로써 싸우기를 굳게 맹세하자.

 

김창숙은 김구선생이 모셔온 애국열사 7분들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모신 것이다.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던 김창숙은 유학자로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을 위해 기존의 성균관을 정비하고,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기치로 명륜전문학교를 병합, 1946년 9월에 광복 이후에는 다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되었고 전국 유림을 정비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 2월에는 전국의 향교를 규합해 성균관대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유도회의 분쟁에 말려들었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며느리가 기억하는 시아버지는 외로운 며느리에게 "담배를 가르쳐 피우게" 하고 '배고프면 허리띠를 졸라매라' 돈 봉투를 누가 가져와도 돌려보내는 시아버지... 불의(不義)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심산 김창숙 선생...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것을 못 보고 가는 것을 아쉬워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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