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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나들이' 부처님 오신 날 "보문사. 적석사. 전등사. 정수사" 여행

밝은풀 2023. 5. 2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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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나들이' 부처님 오신 날 "보문사. 적석사. 전등사. 정수사" 일일 여행 

강화도는 서울에서 가깝고 일일 코스로 가볼 만한 절들이 보문사. 전등사. 정수사. 적석사. 청련사. 백련사가 있고 그 외 크고 작은 절들도 있다. 강화도 절에 들러서 마음을 힐링하고 돌아오는 길에 강화 인삼센터에서 강화 인삼과 다양한 강화 농산물 사서 오면 아주 좋은 코스이다.  

 

강화 보문사는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까지 가서 보문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자가용을 가지고 가면 배에다 차를 싣고 석모도에서 차를 가지고 보문사 가면 편안하다. 

 

보문사는 석불전과 마애불이 유명하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석불전이 눈에 들어온다. 큰 바위를 지붕으로 된 석불 법당이다. 석불전 기도를 마치고 산위의 마애불에 오르면 된다. 강화도 안쪽 작은 섬 석모도에 자리한 보문사는 불자들한테는 한국 관음신앙의 3대 성지 도량 중 하나로 꼽히는 명찰이다. 다른 성지로 꼽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남 남해섬 보리암에 비해 관음에 얽힌 전설이나 역사적 내력이 화려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성지로 격상된 건 바로 절 들머리 급경사 진 암벽에 1928년 새겨진 근대기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마애관음보살좌상을 여기에 새겼을까. 마애불에서 기도 후 돌아서면 바다가 펼쳐진다. 그 자리에 부처님을 모신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특히나 눈썹 바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해 바다의 경치는 장관입니다. 특히 일몰 경관이 아주 일품이어서 석모도의 일몰은 서해 최고의 낙조 (落照)로 꼽히기도 합니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합니다.

 

보문사 석불법당. 마애관음보살좌상

 

적석사 (積石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려산(高麗山)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 당시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416(장수왕 4) 인도승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인도승은 진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절터를 물색하다가 강화도 고려산에 이르러 다섯 빛깔의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를 발견하였다. 그는 다섯 가지 연꽃을 공중으로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지는 곳마다 사찰을 지었는데, 이 절터에는 적련(赤蓮)이 떨어졌으므로 적련사(赤蓮寺)라 하였다.

 

그 뒤 절 이름은 적석사로 바뀌었으며, 1544(중종 39)1574(선조 7)에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44년 묘정이 누각을 중건하였고, 1705(숙종 31) 학균(學均)이 향로전(香爐殿)을 중건하였으며, 1707년 보익(普益)과 승감(勝鑑)이 누각을 중수하였다. 1714(숙종 40) 일행(一行)이 사적비(事蹟碑)를 건립하였으며, 이 비는 2001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적석사 대웅보전

 

전등사(傳燈寺)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경내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다고구려 시기부터 사찰이 세워져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고 중수되었다. 전등사란 이름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붙여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때 중수된 것이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목각상을 벌거벗은 여인인 나부상(裸婦像)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반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그 목각상이 원숭이라는 주장도 있다한때 한용운과 만공의 상좌인 춘성이 주지로 근무하기도 했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신부주(정화궁주)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마니산 사고가 병자호란으로 훼손된 데다 효종 4(1653) 화재로 소실되자 1660년 전등사 경내에 정족산 사고를 설치하고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정족산 사고는 적장산, 오대산, 태백산과 함께 조선 후기의 실록 보관소가 되었다. 1707,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고를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고는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1726년에는 영조가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편액을 내렸고,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를 중수하였다

 

전등사 대웅보전과 나부상

 

정수사(淨水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 85번지에85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또한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639) 회정선사가 정수사(精修寺)를 창건하였으며, 회정선사가 이 자리가 불자가 정히 수도할 만한 자리라 하여 정수사(精修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조선 세종 8(1426)에 함허대사가 다시 지어 정수사(淨水寺)라고 고쳤다고 한다. 또한 이 이름은 함허대사가 절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정수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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