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 마애불'과 비운의 "동학혁명" 민중과 함께 흘린 눈물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에 고려시대의 마애여래 좌상이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은 1994년 5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禪雲寺 兜率庵 磨崖佛)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도솔암 마애불은 1500년 전에 검단선사는 선운사 창시자이다. 원래 선운사 터에는 도적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인근 바닷가에서 소금 굽는 법을 알려 주어 생계 수단을 삼도록 하였다. 검단 선사는 선운사 주변 민초들 사이에서 칭송을 받았고 그는 절벽에 미륵의 모습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러운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비결을 꺼내는 순간 벼락을 맞는다고 전해졌기 때문에 아무도 꺼내보지 못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전 1893년 가을 동학도 300여 명이 도솔암 미륵불의 비결을 꺼내기 위해 도솔암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절실했다. 미륵불에 감춰져 있던 천고의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은 전라도 지역을 휩쓸었다. 3개월 뒤 전주 감영으로 몰려간 양민이 수는 1만여 명이었다.
전라 감사로 도임한 이서구는 어느 날 선화당에 앉아 조용히 천지(天地)의 기운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서남쪽에서 매우 상서로운 기운이 한줄기 뻗쳐 올라가고 있는지라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을 몰아 그곳으로 달려갔다. 선운사 도솔암 미륵의 배꼽에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이 들었기에 이러한가' 하고 그 배꼽을 쪼아보니 그 속에서 책한 권이 나왔다. 그 순간 갑자기 뇌성벽력이 하늘을 찢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이서구는 책을 다시 거기에 밀어 넣고 회로봉해 버렸다.
이때 이서구가 본 것은 '전라 감사 이서구 개탁(李徐九 開托)'이라는 글자뿐이었다고 한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세상 사람들은 그 비결을 꺼내 보고 싶어도 벼락이 무서워 꺼내 보지 못했다 한다. 이 비결이 출현하는 날 한양이 망한다고 함은 곧 조선이 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갑오농민전쟁 때 이 설화가 난무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진원은 바로 이 도솔암 미륵불의 배꼽에서 손화중(孫華中)이 비결을 꺼냄으로써 촉발되었던 것이다. 도솔암 미륵불의 비결을 꺼내기 위해서 손화중 포(包)에 소속된 동학의 접주들은 참모 회의를 갖는다. 논의의 핵심은 벼락살이었다. '비결을 꺼내다 벼락을 맞으면 어떻게 하느냐?' 당시 동학의 접주라 하면 보통 사람보다 지식도 있고 담력도 있는 당대의 진보적인 인사였지만 이들 역시 벼락살이의 존재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돌이켜 볼 때 동학을 뒷받침하던 사상적 배후에는 호남일대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온 미륵 신앙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솔암 미륵불은 한국의 근대사를 한 페이지 넘긴 역사적 부처였다. 절벽에 새겨진 돌부처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선운사의 도솔암은 평평한 바위의 맥을 타고 앉아 있고 그 밑의 절벽에는 거대한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의 크기는 대략 50척 15미터가량 된다. 아마도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한국의 3대 마애불 안동의 제비원 마애불, 경기도 파주의 용미리 마애불 그리고 선운사의 도솔암 마애불 중에 도솔암 마애불이 가장 크고 위엄을 갖추고 있다. 세 곳 모두 미륵부처님으로 일반인들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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