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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침의 나라' 노베르트 베버 "백 년 전 한국과 사랑"에 빠지다

밝은풀 2023. 4. 20.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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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침의 나라' 노베르트 베버 "백 년 전 한국과 사랑"에 빠지다

검은 옷 긴 수염의 독일 선교사 백 년 전 한국과 사랑에 빠지다. 1911년 2월 17일부터 6월 24일까지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의 한국 여행 그 129일간의 기록이다. 베버 이전에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있었고 그들 역시 저마다의 관심사에 따라 기록물을 남겼다. 그러나 베버만큼 깊은 통찰력과 폭넓은 시각으로 한국의 전반적 속살을 들여다본 사람은 없었다.

 

나는 변혁이 막 시작된 이 머나먼 한반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주유周遊했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펜과 내가 찍은 사진들이 많은 걸 기록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힘겨웠던 내 과업에 대한 상급으로 여겼으므로, 귀향할 때 가지고 가서 나 혼자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내가 받은 인상과 옛 기억에서 건진 것들을 공개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 압박을 꽤 오래 견뎌 냈다. 그러나 황급히 퇴락하는 옛 문화의 흥미롭고 가치 있는 잔해들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국 내 고집을 꺾고 말았다.

 

한국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연을 꿈꾸듯 응시하며 몇 시간이고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 산마루에 진달래꽃 불타는 봄이면,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진달래꽃을 응시할 줄 안다. 잘 자란 어린 모가, 연둣빛 고운 비단천을 펼친 듯 물 위로 고개를 살랑인다. 색이 나날이 짙어졌다. 한국인은 먼산 엷은 푸른빛에 눈길을 멈추고 차마 딴 데로 돌리지 못한다. 그들이 길가에 핀 꽃을 주시하면 꽃과 하나가 된다. 한국인은 이 모든 것 앞에서 다만 고요할 뿐이다. 그들은 꽃을 꺾지 않는다.

 

차라리 내일 다시 자연에 들어 그 모든 것을 보고 또 볼지언정, 나뭇가지 꺾어 어두운 방 안에 꽂아 두는 법이 없다. 그들이 마음 깊이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자연에서 추상해 낸 순수하고 청명한 색깔이다. 그들은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색상을 그대로 활용한다. 무늬를 그려 넣지 않고, 자연의 색감을 그대로 살린 옷을 아이들에게 입힌다. 하여, 이 소박한 색조의 민무늬 옷들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원숙하고 예술적이다.

 

1931년 총수도원장직을 사임한 이후에는 탄자니아 리템보로 파견되어 1952년 아빠스 축복 금경축으로 상트 오틸리엔을 한 차례 방문한 것을 빼고는 모국 땅을 밟지 않은 채 선교 소명에 헌신하다가 1956년 선종했다. 1911년에는 칭다오와 일본을 거쳐 서울·공주·안성·수원·해주·평양 등을 두루 방문하고, 1925년에는 촬영기사와 함께 함경도·북간도·금강산 등을 여행하면서 한국의 문물와 풍속과 전통을 글과 영상으로 기록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1915/23)와 『금강산』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1927) 등의 저술을 통해 서양에 소개했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가 1911년 2월 21일부터 6월 24일까지 125일 동안 이 땅 구석구석을 현미경적 시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여행기다. 칭다오에서 출항하여 일본 고베와 오사카를 경유한 여정을 더하면, 기록은 정확히 2월 17일부터 시작한다. 책의 독일어 초판본은 1915년 헤르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나, 번역 대본으로 삼은 것은 1923년 상트 오틸리엔 선교 출판사에서 출간된 재판본再版本이다. 101년 전 이 땅의 자연과 사람과 문물을 글로 묘사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사진에도 담았다.

 

일제 강점기 초엽의 우리네 삶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눈앞에 펼쳐진다. 한반도 주변에 외세가 파도처럼 넘실거렸고, 동아시아 전체를 향한 일본의 야욕을 통제할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5천 년 역사의 조선은 제 이름을 잃고 화살 맞은 짐승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베버가 본 것은 그 시절의 ‘코리아’였다.

 

베버는 서정성과 사실성을 겸비했다. 사찰 같은 건축물의 구조나 디딜방아 같은 낯선 구조물의 얼개와 작동 원리 등을 매우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그는 독일인다운 과학성과 엄밀성으로 철두철미한 사실성을 추구했다. 한편으로 자연과 심성을 묘사할 때는 놀라운 서정성을 발휘했다. 색채 묘사에 있어서 사실성과 서정성은 별개가 아니었다. 그는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며 예술적 감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베버의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은 한국의 자연이었다.

 

베버의 한국은 ‘빛과 선과 색채의 왕국’이었다. 그는 노을과 초목과 아이들의 옷과 불당의 벽화가 빚어내는 모든 색깔과 선을 묘사하는 데 무서운 집착을 보였다. 자신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면 지칠 줄 모르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묘사했다. 베버의 혼을 빼앗은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한국 사람 그 자체였다.

 

그에게 한국인은 선하고 여유롭고 꿈꾸고 자연을 관조할 줄 아는 기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인은 생각 깊은 자연주의자다. 자연의 신비를 관조하고 경청하면서, 그들은 아마 고유의 노랫가락을 특징짓는 떨림음을 바로 종달새의 울음에서 취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이런 심성으로 뛰어난 전통과 예술을 창조해 낸 문화 민족이었으나 ‘부패한 관료와 오도된 정치 체제’로 말미암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 점 베버는 통탄해 마지않았다. 베버는 한국의 자연과 한국인의 심성을 무한히 사랑하였으나 이를 지켜 주지 못한 위정자들은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 교보문고 책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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