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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작품의 모델 그의 딸 "마야 루이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이야기

밝은풀 2023. 7. 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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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작품의 모델 그의 딸 "마야 루이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이야기

피카소 작품에 모델로 등장하는 딸 '마야 루소'...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딸 '마야 루이스 피카소'가 2022년 12월 20일 별세했다.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고인은 어린 시절 아버지 피카소의 그림에 수차례 등장했던 인물이다. 

 

고인은 1935년 피카소와 모델 "마리 테레즈 월터" 사이에서 태어났다. 피카소는  인형을 안고 있는 마야 등 초상화 14점을 그릴 정도로 딸 마야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 1973)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고 1973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큐비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표작으로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 등이 있다피카소는 1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수를 전부 합치면 3만여 점이 된다.

 

dpa통신, 뉴욕타임즈 등에 따르면 고인의 딸이자 피카소의 손녀인 미술사학자 '다이애나 위드마이어 루이스 피카소'는 고인이 프랑스 파리에서 폐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피카소는 딸이 태어나기 8년 전, 45살의 나이에 기혼자 신분으로 거리에서 만난 17살 미성년자인 마리 테레즈 월터에게 구애해 13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1940년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와 결별한 뒤 딸 마야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살며 불운한 생애를 보냈다.

 

피카소는 다른 여성과 법적 부부의 지위를 유지하며 '마리 테레즈'와는 결혼하지 않았다. 1973년 피카소가 사망한 이후, 4년 뒤 '마리 테리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극적 가족사에 대해 피카소의 딸 마야는 1996년 영국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두 명의 미친 부모님 밑에서 정상인 내가 나온 것은 기적이다. 피카소는 내 남편도 애인도 아닌 단지 아버지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피카소 사후 그의 작품에 대해 여러 형태로 정보를 제공하고 자문을 해왔다. 또 고인은 2021년 9월 상속세 대신 피카소의 작품을 물납해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문화부는 2022년 12월 21일 보도자료를 통해 마야는 피카소의 삶과 작품을 조명해 왔다'며 마야의 공로로 우리는 톡특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2015년 2월에 파블로 피카소(1881년 ~1973년)의 손녀가 자신이 유산으로 받은 피카소의 미술작품들을 대거 팔겠다고 밝히면서 미술계가 술렁거렸다. 미술계는 피카소 작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 작품 값이 급락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가 전했다. 

 

피카소의 손녀인 '마리나'는 유산으로 피카소 미술작품 300여 점을 상속받았다. 피카소 작품 중 가족 등에게 상속된 미술작품은 약 1만여 점에 이른다. 그는 작품들을 경매 등을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필요에 따라 내다 팔 것”이라고 말했다.

 

피카소 작품에 대한 전문 사이트를 운영하는 미국 텍사스의 샘 휴스턴 스테이트 대학의 엔리케 말렌 교수는 피카소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 피카소 작품 판매에 속도를 내는 이는 마리나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나가 할아버지의 작품을 대거 팔려고 하는 이유에는 아픈 가족사가 자리 잡고 있다.

 

마리나는 피카소가 첫 번째 부인인 '올가 호흘로바'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인 '파울로"에게서 태어난 딸이다. 마리나의 아버지 파울로는 할아버지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돈을 구걸하며 살던 신세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할아버지 피카소는 손녀인 그와 오빠인 파블리토에게 무관심했다.

 

피카소가 숨졌을 때 피카소의 두 번째 부인인 자클린 로크는 파블리토의 장례식 참석을 막았고, 파블리토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자 자살했다. 마리나도 오빠의 죽음 등으로 15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유산으로 받은 할아버지의 작품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한때 벽 쪽으로 작품을 돌려세워 놓았다.

 

그는 맨 처음 내다 팔 작품으로 피카소의 1935년작  '라 파밀리(가족)’를 꼽았다. 그는 나는 대가족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나의 가족은 가족이 아니었다”며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매우 드물었고, 나에게 할아버지는 없다”라고 말했다.

 

피카소는 평생 가깝게 지냈던 여성만 7명에 이르지만, 결혼은 두 번만 했다. 첫 부인과, 동거했던 두 명의 여성 사이에 모두 4명의 자식을 뒀다. 피카소 사후 마리나는 유산 상속을 예상하지 못했으나, 일부 작품과 빌라를 상속받았다. 그는 “사람들은 내가 유산을 상속받은 데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감사한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없는 유산이었다”고 말했다.

 

피카소가 한때 동거했던 마리테레즈 발테르를 통해 얻은 또 다른 손자는 할아버지가 모든 일의 원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마리나의 어머니에게 돈을 줘도 한 번에 써버릴까 봐, 손자들 교육비를 직접 지급했다”라고 말했다. 마리나는 다섯 아이를 두고 있는데 이 중 셋은 베트남에서 입양했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을 팔아서 베트남과 프랑스의 병원 등을 후원할 예정이다. 그는 나는 지금 현재에 살고 있다. 과거는 과거로 둘 생각이다. 하지만 결코 잊지는 못한다. 나는 피카소의 손녀지만, 피카소의 가슴속에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한국인들을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951년 그는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발표하였고,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피카소는 미술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알렸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1938)을 고발한 게르니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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