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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 '인희 선생' 6.25사변 큰 돈을 번 사연 "태봉胎峯 만력비萬曆碑"

밝은풀 2023. 8. 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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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 '인희 선생' 6.25사변 큰 돈을 번 사연 "태봉胎峯 만력비萬曆碑"

도통 인희선생이, 수련을 하는 과정에 현실의 식구들과 수련에 필요한 경비를 해결한 일들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수련을한 인희 선생을 탄허스님은 인정해 주었고, 자주 인희 선생 집을 들러 이야기를 나눈 사이이다. 탄허스님은 학문과 불법에 능통하고, 인희 선생은 신계를 움직인 주재관으로 도통을 하신 분이다. 그래서 두분은 소통이 잘된 것 같다.

 

인희 선생은 공부를 하러가기 전에 늘 식구들의 생활을 준비해 두고 공부를 떠나는데 칠성에서 장사를 하라고 해서 도()공부하는 사람이 장사는 무슨 장사냐고 했드니 공부를 위한 수단이니 칠성궁이 하라는 대로 해서 전쟁이 끝나고 아주 큰 돈을 번 이야기이다.

 

해평海平 구방산九房山. 경인년(庚寅年) 1950년 봄인데 각화사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나오면서 곧 사변이 일어날 테니 피난 겸해서 삼척 구방산九房山으로 가서 공부하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사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는 인희선생이 부적으로 환자를 많이 고쳐 소문이 사방으로 퍼진 때라, 마을 사람들이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와서 우리 마을에서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모실 테니 이사를 가지 말고 같이 이 마을에서 살자고 만류를 했다. 하지만 인희선생은 하늘의 명령으로 아쉬움을 뒤로하고 삼척 구방산 근처로 가족들과 함께 삼척으로 이사를 갔다.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평릉리平陵里 해평海平이라는 바닷가에 방 한 칸을 얻어 가족을 남겨두고 삼척 구방산에 들어가서 경인년 여름에 49일 한 도수 기도를 했다.

 

구방산은 큰 바위산에 빙 돌아가면서 사람 두명 들어갈 만한 방처럼 된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곳은 삼척 사람들이 와서 일년 사시 사철 기도하는 기도장이다. 그때 스승님과 도반 모두 8명이 49일 기도에 들어갔는데 기도 중에 육이오 사변이 일어났다.

 

고무신 장사. 인희선생과 스승은 구방산 49일 한 도수를 마치고 집에 내려오니 인민군이 들어와서 아무 것도 못하고, 들어앉아, 화전농사 지어 놓은 거 다 먹고 좁쌀 두어 되 밖에 안 남았다.

 

그래서 할 수있는것은 환자를 치료해 주고 양식을 구해 올 생각으로 있는데, 묵호에서 여자들 대여섯이 육이오 사변통에 남편들이 죽었나, 살아있나 그걸 알아보러 몰려 왔다.

 

그 중에 환자가 하나 끼어 있는데 부적을 써 줘서 생활 대책을 삼아야지하고 부적을 쓰다가 보니까 곧 죽을 사람이야. 부적을 쓰다 말고 바로 돌려 보냈는데 이틀 후에 죽었다고 연락이 왔다.

 

인희 선생이 그 다음에 칠성궁에다 항의를 했다지금 양식은 떨어져 가고 환자가 하나 생겼길래 살려 줄까하고 부적을 쓰다보니 죽을 놈이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막혀 버렸으니 어떻게 할테요?”하고 물으니그까짓 시덥잖은 환자 취급해서 되겠소? 장사를 하지.”라고 칠성궁이 말했다.

 

인희선생이 수도자가 장사가 다 뭐요?”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저 김상록이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고무신 장사를 한 서너 달만 하면 될 걸 뭐.“ 신명계에서 하는 말이니 김상록이를 만나서, ”우리 고무신 장사하면 어떠냐 물어면서 밑천 얼마나 있는가?“하고 물으니 가진 돈이 6만원 있다고 해서 6만원으로는 밑천이 부족하니까 아는 집에서 일 할 이자로 9만원을 꾸어 15만원을 장사 밑천으로 해서 김상록이한테 강릉, 묵호, 삼척, 북평으로 돌아다니면서 돈대로 고무신을 다 사 모아 오라고 했다.

 

그 고무신을 집에다 쌓아 두고는 하루에 여나믄 컬레씩 길거리에 내다 파니까 몇 컬레씩 팔리는데 양식이 없으니 고무신 팔아 자꾸 양식을 사다 먹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고무신 다 팔아 먹으면 본전조차 잘라먹게 생겼으니 이잣돈은 어떻게 갚나 생각하다가 김상록이하고 한 짐씩 등에 메고 묵호 시장에 가서 노점을 빌렸다.

 

시장에 나오니 물건이 잘 팔려서, 장사가 되긴 잘 되는데 이문을 꼭 본전에서 2할씩 남겼다, 손님들한테 이거 본전 얼마에 2할 남겨 파는 거요.“하고 설명하면 손님들이 곧이 듣지 않고 그저 깎아만 달라니 나중에는 본전도 찾지 못할 형편이 되고, 그러니 힘이 들고 속이 상해 죽겠다. 그래서 또 칠성궁에다,”수도자가 장사 하려니 힘이 들고 속이 상해 장사 못 하겟다.“고 하니까 칠성궁에서,

 

그래 무슨 장사를 그렇게 꽉 막히게 하시오? 장사를 안 하면 몰라도 장사를 하는 이상 요령도 좀 부리고 수단 껏 해야지. 그리고 도심(道心)은 그대로 가지고 있고, 장사는 장사대로 하면 되지 임기응변이라는 게 있지 않소?“이렇게 칠성궁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수단을 부리기 시작해서 처음에 값을 많이 불러 가지고 조금씩 깎아 주기도 하며 수단을 피우니 장사가 참 잘 되엇다. 누워서 떡 먹듯 했다. 종일 팔려 나가니 돈을 주체할 수 없어서 가마니에 넣고 발로 밟아 메고 들어오고 하니 백만장자가 부럽질 않았다.

 

그 때 일사후퇴가 시작되어 다들 소개疏開하라 하니까 쌀 가게 쌀 장사들은 쌀을 팔고 떠나야 하는데, 누가 쌀을 살 사람이 없었다그 동안 고무신 팔아 모은 돈으로 쌀 한 가마니에 만오천원씩 쳐서 120가마니를 사 가지고, 집을 이미 비우고 마을을 떠난 큰 집에 부엌바닥을 파고 40가마니를 묻고, 긴 방에 80가마니를 차곡차곡 쌓고는 판자로 벽을 만들어 종이로 바르고 보니 감쪽같이 비밀창고가 만들어졌다.

 

인민군들의 가택 수색 때 용케 들키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피난에서 돌아오니 모두들 양식이 있어야지. 그 때 120가마니 쌀을 풀었다.

 

쌀 도매상들이 덤벼서, 만 오천원에 한 가마니씩 사서 모은 쌀을 한 가마니에 145천원씩 120가마니를 단번에 넘겼다. 쌀 장사로 번 돈이 그 때 돈으로 2천여 만원 되었다.

 

태봉胎峯 만력비萬曆碑. 인희선생은 해평 구방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고무신 장사로 돈을 좀 벌어서 다음 기도처로 정해진 울진蔚珍 태봉胎峯에서 백일기도를 작정하고 신묘년(辛卯年) 사월에 또 이사를 했다.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羅谷里에 거처를 정해서 식구를 남겨 두고 기도처는 태봉을 중심으로 세 군데로 나누어 지었다. 본부에는 스승님과 인희 선생 둘이 있었고, 산 속에는 책임자네명을 두고 한 조가 되어 움막을 치고, 바닷가에는 책임자 세명으로 돌담을 치고 공부를했다.

 

공부 들어갈 때는 백일기도를 작정하고 갔다가 거기서 아홉달 동안 공부하면서 책 열 세권을 쓰고 섣달 그믐께야 하산을 했는데 왜 인희선생이 거기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처음엔 모르고 공부를 했는데 책을 쓰다 보니 어떠한 명분이 있는지 이유를 알게되었다.

 

태봉에는 만력비萬曆碑가 서 있는데, ‘만력모년모월모일萬曆某年某月某日이렇게 적혀 있다. 이 비석은 언제 세워졌는지 모르나 그 내력을 들어보면, 연대를 알 수 없는 어느 왕 때에 아이를 낳으면 명산 명당을 찾아 그 태를 묻곤 했는데, 이때 태를 묻었다고 해서 태봉胎峯이 되었다.

 

만력비의 만력은 만세력萬歲曆 책력 도수의 뜻인데, 도태생령道胎生靈 만력도수萬曆度數의 만력비가 섰기 때문에 도태道胎에서 영이 나와 호경수명湖慶壽命으로 선 팔십, 후 팔십의 수명을 얻게 되었고, 만세력 책력 도수의 한가절운漢迦節運을 얻게 되었으니 시와 운을 얻게 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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