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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스님' 그의 은사 "한암 선사"는 탄허(呑虛)라는 법명을 주신 분

밝은풀 2023. 7. 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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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스님'과 그의 은사 "한암 선사"에 대하여 

탄허(呑虛) 스님은 1913년도에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김금택(金金鐸)이다. 탄허스님은 1983615일 열반하셨다탄허스님은 죽기 몇 년 전에 자신이 죽을 것과 죽는 날짜까지 예언을 했는데, 실제로 그는 정확하게 자신이 예언한 날에 죽음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부친은 독립운동의 산실 보천교의 일급간부 출신이였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모태신앙이 보천교였고, 소년시절에 태을주 주문을 읽으면서 총명함이 이루 형언할수 없을 정도가 되어 신동소리를들어면서 자랐다. 13세까지 보천교에서 보천교 수행법과 여러 학문과 서예를 배웠으며, 이극종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웠고, 22세까지 독립운동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뼛속까지 반일(反日)인 분이다.

 

22세인 1934년에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로 출가한 후 학문에 증진하여 1964년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1967년부터 팔만대장경의 한글화 작업에 착수 하였다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일본 도쿄대학의 동양학 세미나에서 화엄학 특강을 하였다.

 

탄허는 어려서 사서삼경과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한 후 1934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일찌감치 학승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불경 번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힘찬 필력의 붓글씨와 비명, 계를 주고 법명을 지어주면서 뜻을 풀어쓴 글 등으로도 세인들의 화제가 되었다.

 

해방후 함석헌과 양주동은 탄허스님으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다고 전하는데 양주동은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듣고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까지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 학문적 깊이에 탄복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가장 현실적이며 직법적인 예언으로 유명한 탄허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관해 언급하고 무엇보다도 주역의 원리에 의거해서 세계열강들의 관계와 미래상을 예측하였으며 변화될 세계상으로 자연재해와 핵으로 인해 전 세계가 70% 정도의 타격을 입을 때 한국도 피해를 보나 한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서 우뚝 서게 될 것임을 주장하였다.

 

백성의 도탄에 관한 탄허의 경고...  탄허는 최고의 지도자가 소인일 때는 그에 따라 10퍼센트의 극악질(아주 악질형) 관리가 등용되어, 10퍼센트의 극선질(아주 선한 부류)은 모두 암혈에 숨을 수밖에 없어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탄허 김금택은 22, 1934년부터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반드시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입적하기 전까지 49년간 한결같이 했으며, 한암선사에게 정식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삭발을 하는데, 선사로부터 삼킬 탄()’ ‘빌 허()’라는 법명 탄허를 하사받았다.

 

특히 탄허는 스승은 제자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자식을 뒀던 탄허는 만 21세에 출가하였는데 승려가 되기 전 인물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책이 없어 주역(周易) 공부하지 못하다가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집에 돌아오지 않아 글방을 방문해 보니 흡사 미친 듯 춤을 추며 큰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처자불고(妻子不顧) 가사불고(家事不顧)를 하지 않겠느냐고 포기했다고 한다. 탄허는 당시 주역을 손에 들고 500() 하였다고 전한다.

 

한암(漢巖)선사님은 불자들은 한암 스님으로 통한다방중원(方重遠 1876~1951)은 대한민국의 승려이다. 법호는 한암(漢巖)이며, 흔히 방한암선사로 불리며, 근세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로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22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성우의 설법을 들었고, 30세가 되던 1905년에는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의 관실이 되었다. 1910년에 맹산 우두암에서 수도했고, 개오의 경지에 들었다금강산 지장암, 서울의 봉은사를 돌다가 50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한번도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

 

1951년 가벼운 병을 얻은 지 1주일 만에 76세로 입적했다.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신 뒤 가사 장삼을 정제하고 선상에 단정히 앉아 참선하는 듯이 숨을 거두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게릴라군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월정사에 불을 질러 태운 국군이 상원사까지 태워 없애려 했을 때, 승려들에게 절을 불태워야 하니 하산하라고 권하는 군인들 앞에서 가사를 갖추어 입고 법당에 정좌해 "내 몸을 함께 태워 부처께 공양하겠다"며 하산을 거부, 군인들이 하는 수 없이 절의 모든 문짝을 떼어 쌓아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내어서 절이 불타는 것처럼 보이게 한 뒤 철수했고, 상원사는 불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선우휘의 소설 상원사는 이 일을 다룬 소설이다.

 

특히 탄허는 스승은 제자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자식을 뒀던 탄허는 만 21세에 출가하였는데 승려가 되기 전 인물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책이 없어 주역(周易) 공부하지 못하다가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집에 돌아오지 않아 글방을 방문해 보니 흡사 미친 듯 춤을 추며 큰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처자불고(妻子不顧) 가사불고(家事不顧)를 하지 않겠느냐고 포기했다고 한다. 처자불고(妻子不顧) 가사불고(家事不顧)는 처자와 집안 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탄허는 주역에 빠진것이다 탄허는 당시 주역을 손에 들고 500독(讀) 하였다고 전한다

탄허스님은 학문이나 도를 능통한 사람을 찾아서 같이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삼척 영은사에 주석하실때 도통 인희 선생에게 삼성암에서 3년을 제자들과 공부도 하고 책도 쓰게 해 주신 것이다. 요즈음 같이 우리나라가 혼란 스러울 때 두분 도인이 계신다면 얼마나 국민들이 마음이 편안할까? 가짜 도인들이 판을 치는 이때, 진정한 도통하신 선지식이 계시면 정말 좋겠다.

 

세계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탄허스님의 예언은 더욱 관심을 받고있다. 그리고 세계의 4대 강대국에서 진액을, 한국에 가져온 박영규 박사, 그중에 특히 일본에서 반가사유상 진액을, 한국에 이미 가져온 종교의 반성을 체험한 박영규 박사의 일도 우연이 아니다.

 

이제 인류에 남은 "후천결실시대"의 선(善)하고 후덕(厚德)한 사람들이, 편하게 살아가는 그런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지금은 그동안 숨어있던 온갖 쓰레기 같은 일들이 부상(浮上)하고 있는 것을 현재 우리가 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까운 날에 가짜 도인들이 무너지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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