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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장 '약산(若山) 김원봉' 독립운동가 유공자 지정 논란은...?

밝은풀 2023. 4. 13.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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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장 '약산(若山) 김원봉' 독립운동가 유공자 지정 논란은...?

 대한민국 서훈 여부는 일본제국에 항거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거나 3.1운동 등에 참여한 이력 등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서훈 여부 및 승인을 가리게 되는데 이 중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는 물론 친북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 기여하였던 인물의 경우 국가보안법 및 국민정서 등을 고려하여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다만 김원봉의 경우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는 이력이 있는 점이 있지만 광복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상훈 수여 이력까지 있어서 국가보안법과 국민정서에 있어서 위배되는 내용이 있다는 점 때문에 현재까지 서훈 여부가 논란이 되고있다.

 

의열단(義烈團)장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은 독립운동 활동을 한 인물이기는 하였지만, 광복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괴뢰 공산당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최고위직에 올랐던 인물이라는 이유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 및 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경남 밀양에 의열 기념관이 있다.

 

2019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두고 일각에서 김원봉을 재평가하고 서훈대상자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정치권에 논란이 확산되었다. 한편 6월 10일 청와대는 약산 김원봉의 서훈 여부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조항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서훈 추진 여부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도 성명을 내고 김원봉은 김일성이 수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수립에 앞장섰던 자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유공자 지정은 안 된다는 반대입장을 밝혔다.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 901번지에서 아버지 김주익(金周益)과 어머니 이경념(李京念)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해김씨 참판공파 18세손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 편입학하였으나 1911년 11월 천황의 생일에 동창 한봉인(韓鳳仁), 윤세주, 강인수(姜仁壽)등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넣은 사건으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혐의를 부인하다가 홀로 퇴교당했고, 다시 보통학교 2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1910년에 동화중학교(同和中學校) 2학년으로 편입학하여 학업을 익혔으며 교장인 전홍표(全鴻杓)의 영향을 받아 항일사상을 갖게 된다.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우리 민족의 원수 강도인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는 점과,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도로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슬프고, 언제나 비참하다'는 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훈시를 하였고, 그는 전홍표 선생의 훈화에 감화되었다.

 

그러나, 동화중학교는 얼마 못가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폐교된다. 그는 밀양 시내의 남천강변에서 축구를 즐겨하고 아침저녁으로 냉수욕하면서 신체를 단련하였고 일본인들이 조선역사에 대한 것을 금지하였음에도 조선의 역사에 관련된 서적들과 위인전기, 지리, 육도심략 등에 대한 서적을 찾아서 탐독하였다. 전홍표 교장의 배일사상으로 중학교 폐교당하게 되자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80원의 성금을 모금하여 폐교를 면하게 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표충사에서 독학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품게 된다. 그리고 1913년 경성중학교에 중앙중학교로 편입학하여 학업에 중시했는데, 거기서 김성수. 유근. 안재홍 등을 스승으로 만나게 되었고, 윤치병. 변영로 등과도 조우하게 된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이로 인해 김일성으로부터 로력훈장을 수여받았다.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1954년 1월 25일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1958년 10월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로 대의원 권한이 박탈되었고,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망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정치법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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