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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림스님' 금강반야의 길을 걸어간 "소천(韶天) 선사" 실천적 사상가

밝은풀 2023. 5. 1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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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림스님' 금강반야의 길을 걸어간 "소천(韶天) 선사" 실천적 사상가

효림스님과 만남을 가진 영상을 보고... 세종시 경원사에 계시는 시인이시며 서예가 스님이 소탈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영상을 두 번이나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5분 각각 종교가 다른 양희삼 목사님과 우희종 교수님과 김근수 선생님, 최영민 감독님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다. 영상이지만 마음이 힐링되었다. 이런 프로그램이 정말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스튜디오 더탐사. 양희삼 TV에 영상이 있다. "그래도 불교에 효림 스님 있다"

 

어떻게 하면 '인류평화 어떻게 오나요' 묻는다면...?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 인류평화가 온다." 공유와 긍정의 힘이다. 

 

그런데 오늘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전) 대표였다는 말씀과 불교 신도들은 '실천불교승가회'를 알고는 있었지만 "소천(韶天) 선사" 실천적 사상가 정신으로서 실천불교승가회를 발족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나 절은 헌금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각(覺) 사상운동. 각(覺)이란 "본 정신 차린자세" 그것이다. 차린자세는 만진리의 주인으로 일체사념(一切思念). 일체사물(一切思物)을 요리하는 왕자이다.

 

광덕스님은 소천스님을 “선구자”라고 했다. 소천스님이 광덕스님에게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자”라고 권유했고, 포교와 더불어 서책(書冊)으로 전법해야겠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또한 “경전의 국역이 치졸한 행위로 지탄되기는 했지만 소천스님은 누구보다 선구자적인 탁견을 갖고 있었기에 한글화에도 각별한 뜻을 지녔다”고 광덕스님은 회고했다. 광덕(光德) 스님도 소천스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1978년 소천스님 입적 당시 석주(昔珠) 스님은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에 ‘소천스님의 입적을 애도함’이란 제목의 추도문을 게재했다. 석주스님은 “겨레의 갈 길을 밝히시느라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며 대강연회를 통해 겨레형제들의 눈을 열고 가슴에 불을 붙여주었다”면서 “민족과 세계를 연결하는 호국호법 철학을 완성하셨던 스님, 마침내 천일기도를 반복하시며 금강삼매에 드시어 조사의 대법을 깨치셨던 스님…”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노구에도 수행을 놓치 않는 소천스님의 모습을 본 시봉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청년시절 독립운동한 용성스님 제자. “도(道)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중생의 것이다.” 소천스님은 깨달음을 성취한 후 반드시 중생에게 회향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용성스님에게 출가한 소천스님은 부산. 마산. 진주 등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펴는데 앞장섰다. 이 무렵은 한국전쟁의 상처로 모든 사람이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던 암흑기였다. 소천스님은 "금강경"의 ‘무상의 도리’로 중생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소천스님에게 ‘도’는 개인이 독점해서도, 독점할 수도 없는 진리였던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하려는 소천스님의 원력은 지극했다.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주지 않았던 역경(譯經)에 스님은 남다른 관심을 두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은사 용성스님의 영향도 있었지만, 한사람이라도 더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도하고자 했던 소천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천스님의 호에는 스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상징’이 담겨 있다. 스님이 출가 후에 사용한 호는 소소(簫韶)이다. 은사 용성스님이 지어준 것인지, 아니면 소천스님 스스로 지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소소라는 법호는 소천스님의 삶과 원력을 대변하는 의미 있는 법호이다. 소소는 ‘중국 순임금이 지었다는 음악 또는 악기’를 나타낸 말이다.

 

소천스님이 소소라는 호를 사용한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망국-식민지-해방-분단-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소천스님이 원했던 세상이 중국 요순시대와 같았다는 점이다. 다툼과 갈등이 없는 세상, 이는 정토와 다르지 않다. 또 하나는 스님 스스로 ‘소소’와 같은 악기처럼 살고 싶지 않았을까라는 사실이다. 평화를 노래하는 악기, 그것이 바로 소천스님이 간절히 원했던 세상이었을 것이다.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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