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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 국립현충원에서 참배한 "스코필드"

밝은풀 2023. 5. 2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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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 국립현충원에서 참배한 "스코필드" 애국지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국립현충원에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 대한민국 애국지사를 참배했다. 한국에 헌신한 캐나다 선교사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3월 ~1970년 4월)" 영국 태생의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이고 수의학자 세균학자 위생학자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보도한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3.1 운동의 제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916년부터 1920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고, 영어 성경반을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19193.1 운동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1920년 캐나다로 귀국하기까지 4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는 3.1 만세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들이 흔들던 태극기 사진들의 대부분을 그가 찍었습니다. 그는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장을 받았으며, 1970년 한국에서 사망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스코필드는 1889년 영국 워릭셔주 럭비에서 태어나 19살에 캐나다로 이민했습니다. 그는 농장에서 가축을 돌보며 수의학에 관심을 두었고,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해 1914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스코필드는 21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왼팔과 다리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힘든 몸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스코필드는 18살 때, 아버지가 근무하는 영국 클리퍼 대학(Cliffe College)에서 한국 유학생 여병현을 만나 한국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이후 그는 토론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세균학 강사로 일할 때 한국에서 사역하던 에비슨에게서 한국선교를 요청받았습니다. 에비슨과 스코필드는 토론토대학교에서 이미 친분이 있었기에 에비슨은 신앙과 전문성을 갖춘 스코필드에게 세브란스 행을 적극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귀국한 뒤에도 캐나다와 미국에 한국을 소개하며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심지어 이승만이 머물던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자신의 3.1운동 견문록인 '끌 수 없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을 출판하려 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을 위해 그토록 헌신한 사람의 책 한 권을 내줄 수 없었던 한국교회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그는 모교 토론토대학교에서 봉직하다가 195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스코필드 기금'을 마련해 고아들을 도우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언론 활동으로 한국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스코필드는 1970년 한국에서 사망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헌신한 캐나다 선교사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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